세상살이

첫 사랑과 장맛비

yousong 2004. 9. 18. 15:41
창 밖이 갑자기 환하다.
하늘은 분명 옅은 구름이 깔렸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폭포같은 물줄기가
마치 물의 근육질을 자랑하듯 내려 꽂힌다.
이런 날을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 했던가.
장가가는 호랑이 놈은 온데 간데 없고
장대비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상념...

젊었을 시절,
그 녀와 만나기만 하면 비가 내렸다.
물론, 초여름이라서 그랬을지도.
그래서 그 녀와 만나는 날은 화창한 날씨라 할지라도
비 올 것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그마한 가방 속에 접는 우산 하나라도 챙겨가야 했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떠올리지 않아도
청춘시절의 낭만은 비오는 날엔 분명 더했었다.
키가 훤칠한 그 녀가 기다리기로 한 종로서적.
종로서적에서 일 끝마치고 기다릴 그 녀를 생각하면
항상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가곤 했었는데
버스 안은 늘 만원이었었다.
기름냄새와 사람땀내 섞인 시금텁털한 냄새가
서민만의 특권처럼 내 코를 자극시키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만 되면
나는 꿈을 꿨었다.
ROTC친구들 처럼 멋진 비옷을 입기를 원했었다.
그 녀에게도 알록달록한 비옷을 선물하고 싶었다.
훤칠하고 깡마른 그녀에게
하얀 바탕에 푸르고 노오란 물방울 무늬가 있는....
그리고 잘룩한 허리를 두를 허리띠에
예쁘지만 심플한 장식을 한 비옷을 사주고 싶었다.

그 녀와 내가 주로 거닐던
삼청공원길....
그 길을 따라 성대 후문까지 천천히 걸으며
푸른 잎새 하나를 따서 그 녀의 머리카락에 꼽고
나를 바라보라던 말에 부끄러운 표정을 짓던 그 모습이
이젠 추억의 장으로 넘어가 버린 지금...
회억되는 그 시절의 여린 감성이 떠오른다.

어느 날...
삼청공원 가로등 밑 벤취에서 후두둑 떨어지던 장맛비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녀에게 내민 접는 우산 하나.
다소 의외라는 표정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그마한 우산 하나가
둘 사이를 팔로 엮게 만들고,
엮인 둘은 머리를 맞대다시피 걸을 수 있었다.
샴푸냄새가 향긋한 그 녀의 머리카락 내음이 좋았다.
그 녀의 가는 허리를 내 팔로 휘감고 걸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져 얼마나 행복감에 젖게 했던가.

그런 그 녀가 저녁을 사겠다고 데려간 곳이 있었다.
'서울에서 두 번째로 잘하는 집'이란 간판의 단팥죽집.
낡고 허름한 삼청동 길가의 집이지만
뭔지 모를 기품이 있어 보이던 곳이다.
단팥죽과 떡, 그리고 향기로운 차들이 있었는데
그 시절 유명한 인사들이 한 번쯤 다녀가는 곳이라 했다.

아주 작은 탁자에 둘이 마주보고 앉았다.
그 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예뻐 보일 시간...
정각 9시를 알리는 라디오의 '뚜뚜띠~' 하는 소리음이
새로운 작은 흥분을 일깨운다.

긴 목을 따라 내려와 어깨에서 멈춘...
단정하게 웨이브진 머리카락,
하이얗고 고운 피부,
이지적이고 서글서글한 눈과 긴 속눈썹,
그 녀의 코보다 조금 더 커보이는 앵초롬한 입술,
화장끼없는 그 녀의 얼굴과 잘 조화를 이루는
작은 금줄 목걸이, 그리고 18K 링.
나무색 줄무늬 쟈켓과
줄무늬 색상에 맞춘 바지....
그리고 바지 아래 드러난 하얀 발목과 발등,
마을의 강을 그린 지도처럼
발등에 그려진 푸른 핏줄....

단팥죽이 나오고,
그 맛에 맛이가고, 그 녀에게 푸욱 빠져 있을 때
그 녀가 던졌던 말....

- 비... 그러면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어.
- 섹시한 느낌밖에 없어.
- 빗방울, 음... 작은 물방울이 톡톡 튀기잖아.
- 그게 재미있어.
- 비 중에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제일 보기 좋아.
- 비는 긴 머리가 세찬 바람에 휘이 날리는 머리카락의 끝자락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아.

그 녀의 오물오물거리던 입술로
마치 요리하듯 잘도 엮어 내려 갔었다.
비 내리는 날엔 진한 사랑의 연가와 같은 노래가 좋다고 하던 그 녀.
그 녀의 말에 귀기울이다 보면
나도 뭔지 모를 작은 흥분이 따랐었다.

그 후,
그 녀는 파일럿과 만났고,
난 지금의 아내와 만났다.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그 녀와 나는 하루차이로 결혼을 해서
제주도 칼 호텔에서 다시 만났었다.

오늘 장맛비를 대하며
갑자기 떠오르는 그녀...
항시 비내리는 날이 되면 첫 사랑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녀의 모습은 지금도 푸르고 아름다울까....
보고 싶다. 한 번쯤은...

裕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