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개의 죽음
나와 함께 강진으로 내려왔던 친구.
이 땅에 내려 오기 전에도 함께 했던 세월이 근 7년에다
미국으로 들어간 여동생이 애지중지했던 세월이 2년이니 나이로 치면 약 17살이다.
잉글랜드 코카스파니얼...
오리사냥개라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성격이 거칠고 굵다.
좋고 싫고가 뚜렷하고 서열을 잘 따지는 놈이었다.
여동생이 서열을 1위로 만들어 놨으니 그 서열을 바꾸는데는 7~8년이 걸렸나 보다.
말을 듣지 않아 길들인다고 회초리도 들어 보고 과자로 달래 보기도 했던 놈.
강진에 와선 거친 성격 때문에 묶여 지냈다.
강진 땅을 밟기 전에는 매일같이 함께 산책을 하곤 했었는데...
그 사납고 사내기질이 다분했던 멍개가 강진 땅에 묻힐 줄이야.
오늘, 아침에 직원이 멍개가 죽었다며 알려 준다.
순간 멍해지는 느낌이 한참 갔다.
어떡해 해야 할 지를 몰라 하고 있는데 직원이 산에다 묻어도 되겠느냐 묻는다.
요양원 뒷산, 보은산 기슭 큰 소나무 밑에 묻었다.
나와 같이 내려온 지, 만 8년이 지났다.
멍개도 8년 전, 이 맘 때 왔으니 딱 8년이 된 셈이다.
나 혼자 오면 마음이 허전하여 데려왔지만 멍개를 위해 해준 것이 없다.
고작 딱 두 번, 내 손으로 목욕시켰던 것이 전부다.
그나마 귀찮아서 동물병원에 보내서 예방주사 맞히고 약 먹이고 미용해 준 것이 전부다.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문득문득 멍개생각에 종일 어두웠다.
미국에 있는 여동생에게 카톡으로 알렸다.
아내와 아들에게도 알렸다.
함께 했던 세월이 있어 그런가 다들 어떡하냐고 묻는다. 나에게!!
죽은 멍개보다 혼자 된 내가 더 안쓰러운 모양이다.
여동생이 키우다 미국 들어가며 내게 부탁한다고 했던 멍개.
미국 들어간 지 7년이 지나 여동생이 한국에 잠시 왔었다.
그리고 멍개가 보고싶다며 내려왔는데 멍개가 여동생을 몰라 보는게 서운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신 쓰다듬어가며 이야기를 하던 여동생은 멍개를 참 많이 좋아했나 보다.
여동생 집에선 호강했던 놈이다.
침대에서 자고 밥 먹을 때는 가끔은 삼겹살도 사람보다 먼저 얻어 먹곤 했단다.
늘 멍개중심의 생활이었으니 당연히 서열이 1위였을 수밖에.
그러던 멍개가 내게 와선 찬밥이 되었다.
혼도 자주 났었고, 먹는 것은 철저히 사료만 먹이고 일 때문에 거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엊그제던가?
꿈에서 멍개를 보았다.
컹컹 짖는 소리에 짖지 말라 소리쳤던 장면만 떠오른다.
죽음에 대한 암시였는지 모르지만 멍개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하고 돌봐 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작년 여름, 동물병원에서 심장사상충에 걸렸다며 병원입원치료 하면 30% 살릴 수 있는데 60만원이란다.
그 때, 잠시 멈칫했었다.
매년 예방주사 맞히곤 했는데 심장사상충이라니.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수명이 6개월 정도 남았고 서서히 죽을 것이다 했다.
제 때 치료해주지 못한 미안한 내 마음에 늘 부담으로 자리잡았던 멍개가 오늘 새벽에 죽은 것이다.
옥상으로 나가 멍개가 묻힌 곳을 향하여 한참을 보았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텐데 죽음을 맞는 순간은 어떠할까?
나 죽을 때 곁에는 누가 있을까?
내가 묻힌다면 어디에 묻힐까?
갑자기 멍개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으로 프로젝션하는 나를 발견하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멍개가 죽음으로 시끄럽다 고함칠 대상이 사라졌다.
멍개가 죽음으로 나를 위한 위안을 삼을 일도 줄어 들었다.
애견이라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매개동물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013년 4월 8일 청명한 날, 오늘 그가 갔다. 두고 두고 생각날 놈, 마음 한 켠이 허전하기만 하다.
裕松